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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일, 굳은 표정의 형사들이 부산 사상구 덕포시장에서 검거된 여중생 강간살인 피의자 김길태를 결박해 언론사 카메라 앞에 세웠습니다. 피해자 이 양 실종 14일 만이었습니다. 그리고 ‘초동 수사 미흡’이란 여론의 질책에 대통령이 갑호비상령을 내린 지 하루 만이었습니다. ‘14일’과 ‘1일’. 차이가 크지요. 그래서였을까요. 경찰은 기자들 앞에서 ‘맨 얼굴’의 김길태를 세웠습니다. 마스크나 모자를 쓴 피의자가 아닌 경찰은 그 ‘얼굴’이 필요했습니다. ‘무죄추정의 원칙’과 ‘인권보호를 위한 경찰관 직무 규칙’을 어겨가면서요. 강호순과는 본질이 다릅니다. 강호순은 기자들 앞에서 모자와 마스크를 썼었으나, 모 언론에 의해 최초로 공개된 이후, 우후죽순으로 기타 언론사가 그 뒤를 따른 경우입니다. 그리고 전 국민을 분노케했던 김길태의 초췌한 얼굴은, 곧바로 다음 날 언론의 ‘1면’을 장식했습니다. 그 날 <조선일보>의 머릿기사는 ‘더 이상 가려주지 않는다’였습니다.


 
김길태 검거 직후, 얼굴 공개에 관해 김희웅 사상경찰서장은 “김길태의 얼굴을 언론 뿐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도 공개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판단을 수사본부에서 내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경찰이 노렸던 것 다음 세 가지겠지요. 1. 김길태 검거가 늦어지자, 애초에 김길태의 얼굴 공개를 계획함으로서 스스로 명분을 만든다. 2. 그 명분을 뒷받침 하면서 ‘국민적 분노’를 얼마든지 조장할 수 있는 언론이 있다. 3. 김길태 개인의 잘못일 뿐이다. 그 ‘판단’은 헌법보다 상위법이었나봅니다. 대신 국민의 ‘법 감정’이나 ‘공공의 이익’ 등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그리고 사건 발생 2일 만에 ‘김길태의 얼굴 공개는 인권침해’라는 진정이 인권위원회에 접수된 상태입니다.


 
이렇게 흉악범 얼굴 공개를 마주하는 우리의 자세는 크게 두 가지 입니다. 헌법과 피의자의 인권 존중이라는 측면과 국민적 공분을 산 피의자의 얼굴 공개가 또 다른 범죄예방을 위한 공익에 부합한다는 것. 그렇다면 후자의 ‘국민적 공분’은 어떻게 조성되는 것일까요. 바로 ‘언론’에 의해서 입니다. 우리 사회의 실상을 반영하는 ‘언론’의 수준은 김길태 사건으로 대한민국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모 신문은 ‘적법하지 못한 방법’으로 구한 그의 생활기록부, 유년사진을 낱낱이 공개해 그를 대중 처형장 앞으로 끌어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이미 김길태를 만든 사회와 복역 중 한 번도 그에게 성범죄 관련 교육을 하지 않은 교정행정을 잊었습니다. 과녁은 하나고 화살은 수천만 개인 양궁 경기와 같았습니다. 과녁이 하나 생기자, 언론(전국중앙일간지 기준)은 김길태 검거 후 지금까지 기사, 아니 화살 600여개를 쏘아댔습니다.


 
경찰서 말하는 김길태의 얼굴 공개는 우리네 ‘공익’과 얼마나 부합하고 ‘법 감정’에 얼마나 수렴하는지 절로 의문이 듭니다. 2008년 경기도 서남부 연쇄살인사건 용의자 강호순의 얼굴이 최초로 공개된 이후, ‘그 얼굴’이 ‘공익’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언론 관계자에게 묻고 싶습니다. 물론 아직 경찰의 ‘흉악범 얼굴 공개 가이드라인’이 발표되지 않았고 정부의 특례법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돼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또 한 번 묻고 싶습니다. 김길태의 얼굴은 강호순, 유영철, 정남규 등 흉악범의 얼굴과 어떻게 다른지도요. 결국, 해마다 반복되는 다른 이름과 다른 얼굴들의 비슷한 몹쓸 짓이 ‘언론’의 이름으로 본질은 뒤로 한 채 호도됩니다. 김길태는 왜 이 양을 강간하고 죽였을까요? 김길태는 경찰의 추적을 피해 빈 집에 도망다니며 거주했다던데, 부산 사상구 덕포동 재개발 지구의 면면은 그간 어땠었을까요? 왜 김길태는 11년이나 복역하고 난 뒤에도 또 성범죄를 저질렀나요? 2000년 이후, 한국의 성범죄는 해마다 늘어 지난 해 약 2만 여건에 육박했다던데, 그간 강호순의 얼굴 공개는 어떤 역할을 했나요? 성범죄자 들은 범죄 행위 이전에 신상 공개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까요?


 
얼굴 공개는 ‘공익’이란 이름하에 시행된 대중들의 호기심 충족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호기심이 충족되면, 그 얼굴과 사건은 잊혀집니다. 국민의 호기심은 언론의 좋은 먹잇감이 되지요. 김길태의 사진이 아무런 원칙도 없이 경찰의 자의에 의해 이렇게 보도 되면, 앞으로 있을 흉악 범죄 이후 기자들은 피의자 사진부터 찾아 보도할 테지요. 거기서 또 보도 경쟁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김 기자는 고등학교 졸업 사진 구했다는데, 이 기자는 앨범 제대로 안 뒤질거야?’ 데스크가 이런 주문할지 누가 압니까.


 
결론은 자명합니다. ‘얼굴 공개 논란’을 조장하는 것보다 김길태의 탄생 단초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론이 할 일입니다. 언론은 지금 김길태 사건에 관한 호들갑이나 생중계를 할 때가 아닙니다. 정부가 ‘사회적 안전망’ 구축에 소홀하다면, 언론은 지적해야 합니다. 김길태 사건 기사를 보면 기시감이 드는 것이 한 두 개가 아니란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하루 평균 약 55명이 성폭행이나 강간을 당하는 이 나라에서 언론의 피의자 얼굴 공개는 어쩌면 ‘아무 짝에 쓸모 없는 배부른 소리’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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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써보는 허접서평] 소크라테스의 변명

오감 五感 | 2010/03/18 16:18
Posted by 낮은 목소리





 하버드 로스쿨의 판례 수업은 '소크라테스 대화법(Socratic Method)'식으로 진행된다. 고대 그리스 시대 궤변으로 우민들을 현혹하던 소피스트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자기 모순을 발견하도록한 소크라테스의 방식을 차용한 것이다. 종래는 답변자 스스로가 자신의 '지식의 깊이' 혹은 '무지(無知)'를 자각하게 하는 것이 목적인 이 대화법은, 비록 혹독하지만 - 자신의 밑천이 떨어질 때까지 냉철히 물어오는 교수를 떠올려 보라 - 그 교육효과가 입증돼 하버드 로스쿨 이외에도 전미 로스쿨에서 이 교육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소크라테스 사후 약 2500년이 흘렀지만, 현대사회 최고의 지성이 모였다는 미국의 학계에서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이 사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왜, 소크라테스인가.

 플라톤의 저서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고대 신 중심, 자연철학 중심 사회에서 홀로 인간을 탐구했고 대중을 선동하는 궤변론자의 비논리에 맞서 싸우다 결국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독백을 담는다. 그를 향한 델포이의 신탁은 '소크라테스는 만인 가운데에서 가장 현명하다'였다. 그는 스스로가 '가장 현명한 사람'임을 입증하기 위해 시대의 정치가, 시인, 장인들을 만났지만 그들의 무지에 실망한다. 그리고 '멜레토스'와 같은 적을 만든다. 멜레토스와 같은 '최근의 고발자'를 포함해 그를 성토하는 '예로부터의 고발자'들의 소장에 나타난 그의 죄목은 한 마디로 '시대의, 권력의, 대중의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었다.

  직접민주주의 시대에 대중을 영합하여 자신의 정치적인 권력을 가지는 데 있어 가장 쉬운 방법은 '웅변'이었다. 청자들의 선동을 위해 웅변의 '논리'는 종종 달변가들에 의해 변질되거나 궤변으로 빠지기 십상이었고, 소크라테스만이 그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말주변'에 감춰진 얕은 지식, 허술한 논거가 드러나게 된 소피스트나 시대의 권력가들에겐 소크라테스는 눈엣가시와 같았다. 책 본문에서도 드러나듯이 '무엇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거의 또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위정자들의 약점이자 활용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지성인으로 참된 지혜와 신념으로 지성의 '실천'을 원했던 소크라테스는 외로웠고, 끝끝내 독배를 든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변명에서 스스로를 그리스의 '등에'라고 칭했다. 소크라테스는 하루 종일 한결같이 시민들을 붙잡고, 각성시키고, 설득하고, 비난하는 것이 자신의 천직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지금 이 시대, 우리의 '소크라테스'는 누구인가? '동양엔 <사서>가 있다면 서양엔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있다'는 말처럼, 아테네 법정에서 일갈하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2500년이 지금도 유효하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 이외에 그 어떤 철학적 지식체계를 갖추지 않았던 그의 '대화법'은 지금 이 순간에도 미 로스쿨 강의실에서 재현된다. 교수는 소크라테스, 학생은 소피스트 내지 제자가 되어 묻고, 답한다. '네가 아는 것이 아는 것이 맞는가? 맞다면 어떤 논리인가? 그 과정은 합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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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번째 개강맞이

토로 吐露 | 2010/03/03 19:04
Posted by 낮은 목소리


8번째 개강을 맞이했습니다. '공식적'으로 마지막 학기라서 그럴까요. 화창한 봄 햇살 아래 설렌 표정으로 교정을 활보하는 신입생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어설픈 진한 화장과 짧은 치마, 화려한 원색의 색상의 옷을 입은, 이제 갓 고등학생 티를 벗은 10학번 후배들. 02학번 선배와 저는 구석에서 커피를 마시며 음울히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물론 저도 그랬습니다. 말로만 들었던, 3년 간 무식한 공교육 아래 한 줄의 희망이었던 '대학교'라는 곳에 있었으니까요. 새로운 친구, 동아리 모집의 손짓, '새내기'라는 이름하에 허용되었던 자유들 등등. 스무 살 성인이 된 것보다, '학생'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었으면서도 술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던, 어렸던 시절이었습니다.

오늘 '현대 시민생활과 법'을 강의하시는 한상돈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간은 인간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 당장 노인정에 가보라. 기력이 없어 걷지 못하는 사람, 눈이 침침해 보이지 않는 사람, 귀가 안 들리는 사람...다, 시간이 빼앗아 갔다. 여러분들, 참 좋은 시기다. 그리고 중요한 시기다. 20년 후에는 각자의 모습이 지금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대학로보다, 도서관에 있어야 하는 시기다"

1,2 학년 때 분명 이런 말씀 하셨던 교수님이 계셨지만, 그 땐 귓등에도 안 들어왔던 저의 방탕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이제는 어찌나 절절히 그 말에 공감이 가던지, 수강정정 기간이라 정식 수업을 하지 않음에도 꼼꼼이 말씀을 받아 적었습니다. 이제야 대학생이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 알 것 같은데, 이제야 대학교 시험을 잘 치는 방법을 알 것 같은데, 마지막 학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졸업이 가까워오니, 이제 저는 더 이상의 대학교에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개강의 설렘이 교정 가득 차 있어도, 몸과 마음이 동하지 않아야 정상인 시기이니까요. '개강을 잘 맞이하고 있냐'는 P 선배의 문자에, 저는 '뒤숭숭하고 민망하고 외롭다'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오늘은 정말, 그랬습니다. 이제는 늙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쓸쓸히 무대를 내려가야 하는 퇴물 뮤지컬 배우의 기분이 이럴까, 싶었습니다. 사회로 나가면, 또 막내 기분을 느껴볼 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 곳'은 더 이상 학교가 아니잖아요.




P.S 우울했던 오늘,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아주대 국제협력처 주최 '제 1회 교환/복수학위 우수 블로그 선발대회'에 장려상에 입상하여 상장과 조촐한 상품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지나치게 사담이 많았는데 말이죠) 리투아니아에 있을 때, 심심하고 외로울 때마다 그 곳의 생활을 '리투아니아 LIFE'에 끄적끄적 댔었는데, 이 대회가 있는 줄 진작 알았다면, 본격적으로 잘 해봤을 건데 말입니다. 그래도 대학 다니면서 대학교에서 주는 상 처음 받아보긴 했네요. 보통 블로그 하나가 미니홈피 열 개보다 낫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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